"신이 없에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 신이 그 사람에게 가장 먼저 주는 것이 오만함이네" — 테오그니스

어릴 때 너무 컸던 나의 자아는 나를 매사에 으스대게 만들고, 내가 제일 중요하고 무슨 일이든지 제일 잘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주위 친구들에게 좋게 보일 리 없었기에 그런 행동들은 결국 나를 왕따에 빠트렸다. 왜 나는 어릴 때 부터 그렇게 오만했을까?
양육과정에서부터 시작된 오만
현재 나의 오만은 양육과정에서부터 시작된다. 부모님은 사랑을 주며 나를 엄청나게 아꼈다. 맞벌이하던 부모님을 대신해 나를 거의 16년간 봐준 이모할머니와 외할머니도 나를 끝없는 사랑으로 키워주셨다. 내가 하는 행동들 모두에 칭찬이 따라왔고 어떤 것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 자신감은 순식간에 자만심으로 번져나갔다. (주변의 기준에 따르면) 나는 모든 것을 잘했으니 그런 결론을 내리는 것도 어린 마음에는 너무나도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나를 키워줬던 부모님이나 할머니들은 그때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 내가 나 자신을 믿고 다양한 의견을 위협없이 흡수하는 이런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분들의 덕택이다. 만약 내가 다시 양육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면 한치의 망설임 없이 같은 사람과 같은 방식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내가 최고다"라는 생각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우선 그 생각은 일방적인 (애정이 어린) 데이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동화 같은 왜곡된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혹여나 다분야에서의 재능이 보여 그 칭찬들이 현실을 기반으로 하는 데이터라 하더라도 어빙 벌린이 말했듯 ‘재능은 단지 시작점에 불과하며’ 경험적으로 내가 가진 재능은 정말 재능있는 사람들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지 않은가. 동시에 재능이 최고의 정점을 찍기 위해선 오만이 아닌 겸손이 기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데이터를 통해 알고 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내 안의 불꽃과 쌓아져 있는 장작들을 꺼트리는 사람이 바로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오만함의 씨앗은 양육방식에 의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나의 오만을 설명할 수는 없다. 삶의 경험들과 행동/생각이 오만을 증폭시키며 또 다른 오만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파헤쳐 지금의 오만을 직시하고, 왜 그것을 이유로 오만을 정당화할 수 없는지, 그리고 그것을 제어하기 위해 이제는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행동 방식을 정리함으로써 더 나은 자신이 되고자 한다.
목표가 준 오만
나는 대부분 또래들의 생각과 사상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그 사실이 나를 우월감에 취하게 한다. 그리고 그 우월감은 주변 사람들과의 비교를 통해 극대화된다. 하지만 그것을 이유로 오만에 빠질 수 없다. 가장 먼저 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은 나는 내 계획을 실행하고 현실에서 증명받았는가, 아니면 플라톤이 말한 ‘생각을 뜯어먹는 사람’이 되어 내 머릿속에서 혼자 스티브잡스가 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객관적인 현실을 회피하고 혼자 앉아 생각과 말로만 편하게 꿈을 이뤄 나가며 자위했다. 생각으로 어떤 일을 해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지 않나? 거울을 보면 난 그저 독서와 생각을 좋아하고 취미로 음악을 즐기며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23살 남자 대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과연 이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나 자신인가?
두 번째로 물어보고 싶은 점은 목표를 현실에서 증명했다면 오만해져도 된다는 말인가?
오만은 배움을 멈춤으로써 (피드백을 포함해) 개인을 퇴보시킨다.
에픽테토스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배우기란 불가능하다"고 한 것처럼 오만은 객관적인 시선을 빼앗아 발전을 멈춘다. 수많은 기업이 진보와 발전을 택하지 않아 퇴보하는 잘못을 보지 않았는가? 고로 오만을 가지고 있다면 얻어낸 성공을 키우거나 유지할 수 없다. 또한 오만은
올바른 사회생활을 영유하지 못하게 한다. 과거 내가 어렸을 때 당했던 왕따처럼 "오만한 사람은 주위에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나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같은 과오를 반복해 내 친구들과 좋은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 그리고 지금 가장 큰 문제인데, 현재 오만한 나는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 나는 모든 일을 다 해낼 수 있다. 제일 잘 해낼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렇게 나는 모든 일을 혼자 다 하려고 했다. 음악을 만듦에 있어 피아노/기타 연주, 작곡, 작사, 사운드 디자이닝, 프로듀싱, 믹싱, 마스터링, 앨범아트 작업, 비디오 클립 편집, 음악 출판, 마케팅 계획과 홍보까지 말이다. 모든 학문을 책으로부터, 강의로부터 공부했고 만들어나갔다. 나에게는 협업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모든 일을
혼자선 완벽하게 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제드, 스크릴렉스, 잭유를 포함한 성공한 아티스트들을 분석해보면 그들이 혼자 모든 것을 해낸 것이 아니란 것을, 수많은 사람의 도움이 있었기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프로듀서는 자기가 그린 그림을 최고의 능력을 갖춘 사람들과 함께 그려나간다. (리더의 조건도 같은 선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오만을 더더욱 경계해야만 한다. 오만은
개인의 중점을 목표에서 자기 자신으로 돌리는 비생산적인 결과 또한 초래한다. "그 목표를 달성하자"에서 "내가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가"로 말이다. 서서히 내면의 기준 (목표)에서 주변의 시선과 자신의 이미지를 먼저 신경 쓰게 되며 이는 전혀 생산스럽지 못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잃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조지 마셜 장군은 국가의 요청으로 초상화를 그려야 할 때마다 완성된 초상화를 보지도 않고 나갔다. 현대인들이 중요시하게 생각하는 자기 홍보에 보내는 시간을 부질없게 생각하고 정말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중요시하게 생각하는 모습이다.
나 자신에게 세 번째로 물어보고 싶은 질문은 대담하고 포괄적인 비전만이 성공을 가져다주는가? 하는 것이다. 폴 그레이엄은" 대담하고도 포괄적인 비전을 너무 일찍 세우지 말라"고 했다. 드롭박스도, 에어비앤비도, 페이스북도, 구글도 그런 대담한 이상을 가지고 시작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그들은 위대한 기업이 되겠다는 생각에 앞서 바꾸고 싶은 문제에 집중했다.)
수능이 준 오만
수능의 결과도 나에게 오만함을 줬다. 모든 과목 4등급을 받던 고1 겨울방학을 기점으로 공부를 시작해 결국에 수능에서 대부분 1등급을 받아 냈다. 원래 공부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목표를 가지고 제대로 공부를 시작하고 나서 실패와 좌절, 고통을 감내해 결국에는 수능에 성균관대학교 합격이라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만들어낸 이 결과만을 음미하고 언젠가부터 나는 내가 머리가 좋다는 생각에 빠졌다. 이 생각을 깨부수기 위해선 결과가 아닌 과정을 분석해 볼 필요성이 있다.
우선 나는 부모님의 지원과 과외선생님의 도움을 받았다. 나는 과외선생님이 없었을 적에 내가 공부를 혼자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어머니의 피드백 ("공부를 비효율적으로 하는 것 아니냐")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때 엄마가 나에게 그렇게 과외를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나는 공부 방법을 배울 수 없었을 것이고 이런 결과를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오만한 고집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피드백이 부모라는 특수한 관계를 통해 받아들여졌기에 망정이지, 이래도 오만한 생각을 가져야겠나?
그리고 내가 그 일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내면의 기준에 귀 기울이고 부족한 부분을 끝없는 노력을 바탕으로 채워나갔기 때문이다. 내가 천재여서 이루어 낸 일이 아니다. 내가 가장 똑똑해서 이루어 낸 일이 아니다. 쓰러져가며 순전히 열한시간씩 내가 제일 못하는 부분을 인식하고 채워나갔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리고, 나보다 공부 시간도 작으면서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낸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이런 데 어떻게 오만해질 수 있겠는가? 그 결과는 오만이 이루어낸 일이 아니라 주변의 도움과 (현실과 부딪치며) 부족함의 인식, 그리고 노력이 만들어 낸 일이다. 결과만을 바탕으로 그것을 오만으로 대체하고 또 다른 성공을 바라는 것은 마치 총으로 사자를 잡고 사냥에는 총은 필요 없다며 그것을 버리고 사자를 길들여 사냥하려는 짓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 Fac, si facis. 실제 일을 수행하며 결과로 증명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다. 그것이 미치광이와 기업가를 가르는 유일한 차이이자 아마추어와 프로를 나누는 기준이며 내가 미치광이와 아마추어가 되지 않기 위해 잡아야 할 단 하나의 밧줄이다. 말로 목표를 실행하며 거짓 만족감을 느끼는 것은 초등학생부터 침대에 누워있는 늙은이까지 아무나 할 수 있다.
- '나는 내가 생각하는 위대하고 완벽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뼈에 새길 것이다. 다시는 공허한 생각을 뜯어먹고 살지 않는다.
- 객관적인 현실에 부딪히며 목표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내 앞을 막는 문제들에 대해 작은 증분적인 개선을 지속해서 이뤄나갈 것이다. 효율적인 개선을 위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비판과 피드백을 수용할 것이다.
- 그러한 객관적인 현실을 걸어가는 길은 온갖 말도 안 되는 일들로 점철되어 있을음 인식한다. 현실을 뚫고 나가기 위해 고개를 숙여야 할 일이 있음을 깨닫고 그것은 후퇴가 아닌 전진임을 인식한다. 자아를 작게 유지하며 겸손해진다.
- 외적 기준이 아닌 내면적 기준에 초점을 맞춘다.
20190202 강병준.